| 성명 | 세례명 | 순교일(음력) | 순교형태 | 나이 | 거주지 | 비고(관변기록=’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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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원(金俊遠) | 아니체토 | 1845.12 | 광주 하우현 | 김선영 신부의 증조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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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일(음력) : 1845.12(혹은 1866) 하우현(下牛峴, 현 의왕지 청계동) 마을에 살던 김준원(아니체토)이 1845년 9월에 역시 광주 포교에게 잡혀 그 해 12월에 남한산성에서 치명하였다. <한국교회사연구소, “교회와 역사” 74호, 1981. 10, 5쪽 ; 93호, 1983. 3, 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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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심(金允深) | 베드로 | 1868.02.15 | 68 | 광주 구산 | 김성우 성인의 아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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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심(金允深) 본명 文集 ‘문(文)자 집(集)자’ 할아버지는 병인박해 때까지 계속 옥에 계신 걸로 우리는 알고 있고, 그 ‘문자 집자’ 아드님이 ‘경(敬)자 희(熙)자’ 여요. 그리고 형님의 아드님, 맏형의 아드님, 그 사촌의 아드님, 이렇게 아들, 조카들이 병인박해 때에 붙잡혀 함께 있다가 순교하신 걸로 들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敎)자 익(翼)자’ 할아버지가요, 양가로는 안당(즉 김성우 안토니오)이 할아버지이고, 친가로는 ‘문자 집자’가 할아버지입니다. 그런데 병인군난 때 문자 집자 할아버지는 계속 옥에 계셨고, 그 아드님 ‘경자 희자’와 손자 ‘교자 익자’ 3대가 다 잡혀 갔답니다. 같이 옥고를 치르는데, 형 집행하는 날이 닥쳐 가지고서 포교나 형리들이 우리 집안을 잘 안답니다. 근데, 할아버지. 아들. 손자가 한 날 한 장소에서 목을 치게 되었다. 이렇게 되었어요. 그래서 포교가 어린 손자 ‘교자 익자’의 등을 밀어 제쳐서 순교를 못했다. 이렇게 전해 옵니다. 그리고 ‘교자 익자’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 참에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순교하지 못한 것에 가책을 받으며 사시다가 돌아가셨답니다. ‘교자 익자’ 그 할아버지가 세 분의 유해를 사흘에 걸쳐 밤이면 몰래 한 사람씩 업어다 둘째 할머니네 마루 밑에 안치했다가 장사지냈다 합니다. 그러니까, ‘교자 익자’ 그 분의 직계만 시체를 모셔왔지요. 당시 할아버지 ‘문자 집자’와 친아버지 ‘경자 희자’와 양아버지 ‘성자 희자’요. 후손들의 증언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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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희(金聖熙) | 암브로시오 | 1868.02.15 | 54 | 광주 구산 |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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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년 부친인 김성우가 순교하자, 그 시체를 구산 가족 묘지에 안장하고, 가족들과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한편, 그는 한의학을 공부하여 약국을 경영하면서 약값이 없는 불우한 사람을 도와주기도 하였고,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는데, 족보에는 ‘약국 할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그는 사촌 동생 차희. 경희. 윤희, 양자 교익과 함께 광주 포교에게 잡혀 남한산성 감옥에 갇히었다. 관장은 그에게 배교를 강요하며 모진 형벌을 가하였으나, 그는 굽히지 않고 옥에 갇혔다가 1868년 2월 15일(양력 3월8일) 53세의 일기로 순교하였다. 후손들의 증언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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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차희(金次熙) | 1868.02.15 | 40 | 광주 구산 | 김덕심의 차남 | ||
| 김경희(金敬熙) | 1868.02.15 | 54 | 광주 구산 | 김윤심의 외아들 | ||
| 김윤희(金允熙) | 1868.02.15 | 35 | 광주 구산 | 김성희의 6촌 형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