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순교성지

남한산성은 한양의 군사적 요지로 천주교 박해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는데, 이미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1791년) 때부터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으며, 신유박해 때에는 최초로 순교자 한덕운 토마스가 탄생하였다.
이어 기해박해와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약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 교수, 장살 등의 방법으로 순교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순교하신 분들 가운데 일부분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병인박해 때에는 백지사(白紙死)라는 특이한 형벌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사지를 묶고 얼굴에 물을 뿌린 뒤에 한지를 덮는 일을 거듭하여 숨이 막혀 죽도록 하는 형벌이다.
너무 많은 신자들이 잡혀오자 피를 보는 일에 진저리를 낸 포졸이나 군사들이 쉽게 처형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고안해 낸 형벌이 바로 백지사 형이다.
순교자 가운데 행적이 밝혀진 분은 최초의 순교자인 복자 한덕운 토마스를 비롯하여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일가인 김덕심 아우구스티노, 김윤심 베드로, 김성희 암브로시오, 김차희, 김경희, 김윤희와 이천 단내 출신 정은 바오로, 정 베드로 등 36명에 이른다.
남한산성순교성지

한 시대의 사상이나 영성을 단편적으로 논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서 신중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수원교구 내에서 남한산성 순교성지가 담고 있는 신앙의 유산이나 보배를 한마디로 평가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일이다. 그렇다고 남한산성 순교성지가 담고 있는 신앙의 유산이며 보배인 영성을 묵과한다면 우리 신앙 선조들에 대한 후손으로서의 올바른 자세가 아닐 것이기에 미력하나마 남한산성 성지에 내려오는 신앙의 유산에 대하여 사목적 입장에서 조명해보고자 한다.
남한산성 순교성지가 다른 성지와 구별될 수 있는 특징이며, 현대인에게 주어야 할 유산이며 보배는 바로 남한산성 성지가 신앙의 증거터요, 연령을 위한 안식처라는 점이다. 우선 ‘신앙의 고백터’로서의 남한산성 순교성지는 박해시대 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에 끌려와서 고문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하는님을 증거했기 때문에 붙일 수 있는 명칭이다. 이곳에 잡혀 와서 고문을 당했던 교우들은 자신의 신앙을 일회적이며 부지불식간에 고백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많은 고문과 협박, 회유과정을 겪으면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오로지 ‘애주(愛主)의 용덕(勇德)으로서 신앙을 증거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앙선조들의 혼이 깃든 이곳 남한산성 순교성지는 모든 고통을 감내한 순교자의 신앙 고백터요, 증거터가 된다.
따라서 이곳을 순례하는 순례자들이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신 신앙성조들의 순교정신을 마음에 새기고 되짚어 봄으로써 평소의 삶에서 ‘하느님을 증거하는 참된 표양’으로서 또 하나의 순교자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신앙이 약한 이들에게는 튼튼한 신앙의 뿌리를 내리게 도와줄 것이다.
튼튼한 신앙의 뿌리는 다시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열심한 신앙생활울 해나갈 수 있는 삶의 활력소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이곳능 혹 신앙생활에 회의가 생기거나 믿음이 흔들이는 이들이 찾아화서 신앙을 굳세게 다져가는 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남한산성 성지가 연령을 위한 안식처로서, 또한 연령을 위해 기도하는 장소가 될 수 있다”고 함은 기록상 이곳에서 최초로 순교하신 한덕운 토마스 순교자의 영성을 물려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한덕운 토마스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서울의 저자거리에서 천주교 신앙 때문에 참수를 당하고 방기된 교우의 시신을 거두어 잘 안장해주었는데, 온갖 감시와 박해의 위협 속에서도 이러한 궂은 일을 묵묵히 수행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그의 영성이 빛난다, 그러므로 한덕운 토마스처럼 이 곳을 찾는 순례객들도, 각자의 삶의 환경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찾아가 기도하고 또 이미 돌아가신 영혼들이 영원한 안식의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열심히 기도하는 신앙심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한덕운 토마스 순교자의 영성은 각 본당 연령회원들의 활동에 꼭 들어맞는 것이므로, 모든 연령회원들이 찾아와서 한 토마스 순교자가 보여준 연령을 위한 자발적 봉사활동의 숭고한 정신을 배울 수 있을 것이며, 또 배워야 할 것이다.
이상의 서술에서 필자는 남한산성 순교성지가 연령들의 안식처이자, 연령회 봉사활도의 모범을 본받는 신앙교육의 장이며, 주님께 한평생 삶의 마지막을 올곧게 봉헌하는 증거터이자 신앙 고백터이므로 신앙생활의 시련기에 처한 교우들에게 다시 굳건한 믿음을 가져다주는 신심 단련의 장소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남한산성 순교성지는 이런 점에서 ‘연령회원들을 위한 신앙학교’ 또는 ‘신앙을 굳세게 해주는 신앙의 증거터요, 고백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남한산성순교성지

○ 이땅의 모든 순교자여,
당신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굳은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나이다.
● 저희는 현세에서 악의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며
당신들이 거두신
승리의 영광을 노래하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찬양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위대하신 순교자들이여,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주소서.
● 지금도 어둠의 세력이
교회를 박해하고 있사오니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팔로
교회를 붙들어 보호하시며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지역에까지
널리 펴시도록 빌어주소서.
○ 용감하신 순교자들이여,
특별히 청하오니
우리 나라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 당신들은 이땅에서
많은 고난을 겪으며 사시다가
목숨까지 바치셨사오니
○ 전능하신 하느님께 빌어주시어
교회를 이땅에서 날로 자라게 하시며
사제를 많이 나게 하시고
● 신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냉담자들은 다시 열심해지며
갈린 형제들은
같은 믿음으로 하나 되고
비신자들은 참 신앙으로
하느님을 알아 천지의 창조주
인류의 구세주를 찾아오게 하소서.
○ 참으로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이여,
저희도 그 영광을 생각하며
기뻐하나이다.
간절히 청하오니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빌어주시어
저희와 친척과 은인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얻어주소서.
● 또한 저희가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어 증언하며
비록 피는 흘리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은총을 입어 선종하게 하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남한산성순교성지

1752년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한덕운은 1790년 윤지충으로부터 십계에 대해 배운 뒤 입교하여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모든 일을 행하고, 열심한 천주교 신자가 되는 것이었다.
1800년 10월 한덕운은 가족을 이끌고 광주땅 의일리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던 중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교회의 동정을 살펴 볼 목적으로 옹기장수로 변장하고 서울로 올라가 청파동·서소문 등지를 돌아보다가 순교자 홍낙민 루카와 최필제 베드로의 시신을 발견하고 이를 거두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석방되어 있던 홍낙민의 아들 홍재영 프로타시오를 만나자 부친을 따라 순교하지 못한 사실을 크게 질책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한덕운은 위험을 무릅쓰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돌보아 주는 모범(즉 연령활동)을 보였고, 홍재영을 질책한 사실과 함께 그의 마음 안에 있는 순교의 원의를 드러내었다.
이와 같은 연령활동으로 인해 천주교 신자로 체포된 한덕운은 형조에서 “제가 한 활동은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여긴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니, 지금에 와서 형벌을 당한다고 어찌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만을 바랄 뿐입니다”라고 최후 진술을 하였다.
남한산성 동문 밖에서 1801년 12월 27일(양력 1802년 1월 30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자신이 턱을 괴어야 하는 나무토막을 직접 손으로 받쳤으며, “한 칼에 내 머리를 베어 주시오”라고 말하였다. 그의 의연한 모습에 두려움을 느낀 망나니는 헛칼질을 하였고, 세 번째 칼질에서야 겨우 한덕운의 머리가 떨어졌다고 한다.
한덕운 토마스의 영성은 한국 천주교 연령회 활동의 기원이 되며, 또한 냉담자 권면활동의 본보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시복되었다.
동문 밖 형장에 세워진
한덕운 복자의 순교현양비
우리는 지금 동쪽으로 걸어갑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불림 받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어찌보면 좀 그래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지금 세상으로부터 아무런 미움도 받고 있지 않다면, 그런 경험이 여태 전혀 없다면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인가? 한 번쯤은 돌아볼 필요도 있을 것 같아요.박해시대가 아닌지라,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고 우리한테 뭘 어쩌겠어요. 좀 유별나다 소리를 듣는 정도겠지요. 그것도 거창하다 생각되고 부담스럽다면, 이렇게 알아들어도 좋겠어요. ‘세상이 우리를 궁금해한다.’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이런 표현을 쓰셨어요. 신자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이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 주변사람들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그들과 삶과 운명을 공유하고, 모든 고귀하고 선한 것을 위해 결속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해 봅시다. 단순하고 꾸밈없이 현세를 초월하는 가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드러내 보여준다고 생각해 봅시다. 주변 사람들이 궁금해 할 것입니다. ‘어째서 저 사람들은 우리와 다를까? 왜 저렇게 사는 걸까? 누가 그렇게 살라고 시키는 걸까? 그들은 왜 우리 가운데 살고 있을까?’ 이러한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삶. 이것이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복음선포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궁금해 하도록 합시다! 내가 아무리 신자로서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써도 세상은 내게 관심도 없어 보이고, ‘우리 신자들끼리라도 좀 사이좋게 지내고 질투하느라고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싶더라도, 교회 일 못 본체 외면할 수가 없어서 뒤치다꺼리 하느라 할 수 없이 팔을 걷어붙이는 그 사람. 오늘 여기 많이 오셨는데 성모님 군사들 역할이 그런 거죠. 구역반 봉사자들이 그런 사람들이죠.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궁금해 합니다. “왜 저렇게 사나? 바보같이. 손해 보는 줄 뻔히 알면서도. 자기껏 챙길 줄 모르고 저러는 이유가 뭐야?” 예수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여러분이 유일한 복음서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여러분을 궁금해 하고 읽어보고 싶어 합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동쪽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 이렇게 부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자주 저 자신을 두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동쪽을 향해 서 있나? 내가 가려는 방향이 동쪽인가? 다른 쪽인가? 아니면 반대쪽인가?
나라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미워해 수많은 교우들이 이곳 남한산성으로 잡혀와 군인들에게 매 맞고 고문당하고, 굶어죽고 칼에 목이 잘려 순교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모두들 한 곳을 향했는데, 성의 동쪽입니다. 순교자의 참혹한 시신은 성의 동쪽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가 계곡에 버려졌고, 여러 날 방치되고 짐승에 의해 훼손되었습니다
동쪽은 태양을 맞이하는 방향이지요. 온갖 어두움을 이기는 태양은 꼭 예수님처럼 가장 힘 있는 밝음이어서. 예부터 제단을 동쪽에 두었고, ‘정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님, 시간의 창조주인 그리스도님!’하고 찬미가를 불렀습니다. 남한산성의 순교자들이 온 삶을 통해 해맞이하는 동쪽으로 뚜벅 뚜벅 걸어왔고, 끝내 죽어서 동쪽문을 통해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미사 후에, 동문 밖 시구문 옆. 300여명 천주교인의 시신이 버려진 계곡을 찾아보고 ‘아! 여기가 순교자들이 하늘로 오르신 자리로구나’ 확인하고, 〈순교자들의 전구로 나도 여러 기회를 통해, 빛을 맞이하는 방향, 예수님을 환영하는 방향, 동쪽에 서 있는 사람으로 봉사와 선행의 기회를 거절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도 끝내 태양이신 예수님을 향해 하늘에 오르게 해 주십시오〉하고 잠시 머물러 기도하는 시간을 꼭 마련하십시오. 예수님 닮으려는 희생과 양보로, 동쪽을 향한 마음으로 오늘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많은 인원이 함께 움직이다 보면 그럴 기회가 꼭 있습니다. 예수님 모르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자기네편이 아니라고 하면서 유별나다며 수군수군 할 겁니다. 복음이 선포될 것입니다.
김현 신부
Agere sequitur Esse!
“행위는 존재를 따른다!”(Agere sequitur Esse) 그러니까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마태 7,18) 이곳 성지 성당 제대에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있습니다. 성인의 집안사람들이 죄다 남한산성에서 순교했기 때문인데요.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동생, 김덕심 아우구스티노 순교자의 둘째 아들 김차희라는 분이 계셔요(세례명은 알려져 있지 않는데) 아버지가 남한산성에서 순교할 때 12살 어린이었고, 아버지 옥바라지를 하며 지금의 하남시 구산 땅에서 드나들었던 문이 북문입니다. 집안에서 교대로 밥을 짓거나 죽을 쑤어 갖다드렸는데 집에 돌아와 보면 항상 그 밥그릇에 눈물이 가득했다고 전해옵니다.
어린 시절부터 열심한 신앙심으로 마음을 채워 살았던 김차희는 침술을 배워 생계를 꾸려갔다고 합니다. 꽤 유명해서 여러 마을에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합니다. 1868년 일가친척들과 함께 체포되어서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는데, 옥리들이 자기들끼리 하는 말이 “아무개 포교의 아들이 위급하다며? 저런 이를 어째?”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얘기를 들어요. 오지랖도 넓지. 내가 고문당하고 얻어터지고 당장 죽게 생겼는데, 그것을 듣고는 그냥 지나치지를 못해요. “그거 침 몇 대만 맞으면 나을 텐데 …”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거예요.
왜 그래요? 이제껏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렇죠. 그 말을 전해 듣고 귀가 번쩍 트인 포교가 그를 데려오게 하고 압수했던 침통을 내주어 자기 아들을 살립니다. 그 일이 있은 뒤 그 포교가 ‘자식을 살려 준 은인’이니 마음에 쓰였을 거 아니겠어요? 실컷 두들겨 맞고 돌아와 신음하고 있을 때 찾아와서는, “일단 안 믿는다고 말해놓고 풀려난 다음에 다시 믿으면 될 것 아니냐? 살고 봐야지” 은근하게 권하지만, “안 됩니다” 한 마디로 잘라버립니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마지막 날이 되었어요. 마지막으로 묻는 거예요. 믿겠다고 하면 형장으로 보내고 말겠다면 그 자리에 남는 것이죠. 안 믿는다 한 마디면 살아 나가는 겁니다. 김차희의 차례가 되었어요. 관장이 “그래 네 대답은 무엇이냐? 끝내 죽을 작정이냐?” “안 믿겠습니다!” 형장을 면하고 그 자리에 혼자 남게 되요.
그 포교가 어느 틈에 뒤에 와서는, 자기 아들 살려준 김차희 살리겠다고 “안 믿겠습니다.” 냉큼 대답을 해 버린 거예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내가 대답한 것도 아닌데, 기왕 이렇게 된 것. 살아 나가는 것이 하늘의 뜻이로구나! 할까요? 이제껏 그렇게 살아오지를 않았네요.
“조금 전 대답은 내가 한 것이 아니오. 비록 매를 맞아 죽을지언정 천주교를 버릴 수 없소!” 큰 소리로 외치고는 끝내 친척들과 함께(다섯 식구가 한 날에) 남한산성에서 순교합니다. 남을 살리는 일에는 오지랖 넓다고 입방아 오르고 남들이 수군거리고, 꽤 나선다. 잘난 체 한다. 어쩌고 하더라도. 참지 못하는 사람. ‘좋은 게 좋은 거지’ 분란 일으키지 말고 두루 두루 평화롭게 지냅시다. 그 거짓 평화의 꼬임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 사람. 우리는 종종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해야 할 말을 하지 않거나, 못하는 때가 많죠. 하느님 앞에서 좋은 것을 찾아야 하는데. ‘좋은 게 좋은 거지. 남들도 다들 그러잖아’하면서 끼리끼리 모여서 남의 뒷담화하기도 잘 하죠. 자기를 이웃을 위한 양식으로 내어 놓는 일. 다시 말해, 살리는 일에는 (김차희 순교자처럼) 오지랖 넓다 소리를 좀 듣고, 남 험담하는 일, 죽이는 일에는 나설 줄 모르는. 그런 훈련이 필요할 것 같아요. 순교자는 어느 날 갑작스런, 죽는 순간 마지막 결심으로 순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동안 매일매일 조금씩 알이 채워져 맺힌 열매가 순교임을, 순교자들은 평생 그렇게 순교자였다는 것을 배웁니다.
김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