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한덕운 토마스 연령회장

한덕운 토마스

1752년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한덕운은 1790년 윤지충으로부터 십계에 대해 배운 뒤 입교하여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모든 일을 행하고, 열심한 천주교 신자가 되는 것이었다.

1800년 10월 한덕운은 가족을 이끌고 광주땅 의일리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던 중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교회의 동정을 살펴 볼 목적으로 옹기장수로 변장하고 서울로 올라가 청파동·서소문 등지를 돌아보다가 순교자 홍낙민 루카와 최필제 베드로의 시신을 발견하고 이를 거두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석방되어 있던 홍낙민의 아들 홍재영 프로타시오를 만나자 부친을 따라 순교하지 못한 사실을 크게 질책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한덕운은 위험을 무릅쓰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돌보아 주는 모범(즉 연령활동)을 보였고, 홍재영을 질책한 사실과 함께 그의 마음 안에 있는 순교의 원의를 드러내었다.

이와 같은 연령활동으로 인해 천주교 신자로 체포된 한덕운은 형조에서 “제가 한 활동은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여긴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니, 지금에 와서 형벌을 당한다고 어찌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만을 바랄 뿐입니다”라고 최후 진술을 하였다.

한덕운순교향비

남한산성 동문 밖에서 1801년 12월 27일(양력 1802년 1월 30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자신이 턱을 괴어야 하는 나무토막을 직접 손으로 받쳤으며, “한 칼에 내 머리를 베어 주시오”라고 말하였다. 그의 의연한 모습에 두려움을 느낀 망나니는 헛칼질을 하였고, 세 번째 칼질에서야 겨우 한덕운의 머리가 떨어졌다고 한다.

한덕운 토마스의 영성은 한국 천주교 연령회 활동의 기원이 되며, 또한 냉담자 권면활동의 본보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시복되었다.

동문 밖 형장에 세워진
한덕운 복자의 순교현양비